창녕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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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녕 장씨는 창녕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창업 공신 장일의 후손인 장일이며, 하성군에 봉해진 장간공 장일을 시조로 한다. 창녕 장씨는 창녕장씨와 하산장씨로 불리며, 장씨는 신라 시대 육두품 성씨에 포함될 정도로 역사가 깊다. 고려 시대에는 장정필이, 조선 시대에는 많은 문과 급제자와 공신, 효자, 충신, 열녀, 학자 및 문장가를 배출했다. 2015년에는 약 6천 명의 인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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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장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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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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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경상남도 창녕군 |
시조 | 장간공 장일(張鎰) |
분관 | 창녕 장씨 하산 장씨 |
인구 (2015년) | 창녕: 4,814명 하산: 1,238명 |
2. 본관
창녕 장씨(昌寧張氏) 본관에 대해서는 창녕의 옛 이름이 하성(夏城)에서 하산(夏山)으로, 다시 창녕(昌寧)으로 변천되었고, 시조 장간공이 하성군(夏城君)으로 봉군된 연유에 따라 지금까지 창녕 장씨와 하산 장씨(夏山張氏)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창녕 장씨의 시조는 고려 창업공신 삼태사(三太師) 중 한 명인 장정필의 후손 장일(張鎰)이다. 장일은 고려 원종 때 재신(宰臣)이자 외교가로, 하성군(夏城君)에 봉해졌다.[1]
3. 시조
장일의 처음 이름은 민(敏)이고, 자(字)는 이지(弛之)이며, 창녕의 호족(豪族) 출신이다. 고려 희종 3년(1207년)에 태어나 고종 10년(1223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승평판관(昇平判官)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옮겼다.[1] 원종 초에는 전라·충청·경상 삼도안찰사(全羅忠淸慶尙三道按察使)가 되었다가 이부낭중(吏部郎中)과 병부·예부의 이부시랑(兵禮二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했다.[1]
원종 10년(1269년)에는 국자제주(國子祭酒)로서 서경(西京)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1] 원종 12년(1271년) 삼별초군(三別抄軍)이 진도(珍島)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경상도수로방호사(慶尙道水路防護使)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했다.[1] 그 다음 해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원종 14년(1273년)에는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동지공거(同知貢擧) 등을 역임했다.[1] 충렬왕 1년(1275년)에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보문서태학사(寶文署太學士), 수국사(修國史)가 되었고, 하성군(夏城君)에 봉해졌다.[1]
장일은 관직에 있으면서 8차례나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1] 이는 원나라의 침공이 있었던 고려 조정의 어려운 시기에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된다.[1] 1276년 5월 3일에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장간공(章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 『고려사』에는 그의 성품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정직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행정 능력이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간공의 시 2수가 전해진다.[1]
서거정의 『동인시화』에는 장간공의 아들 정하(廷賀)가 의성현수(義城縣守) 오적장(吳迪莊)의 딸과 약혼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1]
장간공의 묘소는 창녕군 대지면 용소리(龍沼里) 헌진산(獻津山)에 있으며, 김도화가 지은 비문(碑文)과 1988년에 세워진 국역비(國譯碑)가 있다.[1]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는 후손들이 묘사를 지내고, 용소리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날에 동제(洞祭)를 지낸다.[1]
4. 유래
창녕 장씨(昌寧 張氏) 본관(本貫)에 대해서는 창녕의 옛 이름이 하성(夏城)에서 하산(夏山)으로, 다시 창녕으로 변천되었고, 시조 장간공이 하성군(夏城君)으로 봉군된 연유에 따라 지금까지 창녕 장씨와 하산 장씨(夏山 張氏)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1]
창녕 장씨의 계통에 대해서는 세월이 오래되어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대체로 창녕 장씨는 고려의 창업공신으로서 삼태사(三太師)의 한 사람인 장정필의 후손으로 보고 있고, 문헌에 따라서는 태사공 6대손 을파(乙波)가 하산군(夏山君)에 봉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
그 후 고려 원종 때 재신(宰臣)이며 외교가인 장간공(章簡公) 장일(張鎰)이 하성군(夏城君)에 봉군되었으므로, 현재 시조로 삼고 있다.[1]
5. 주요 인물
창녕 장씨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들을 배출했다.
- 공신
- '''장관''' : 조선 개국 원종공신으로 창산군에 봉해졌다.
- '''장계증''' :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 충신
- '''장승지''' :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하였다.[1]
- '''장천장''' :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하고, 이순신 장군 휘하의 옥포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1]
- '''장시헌'''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위한 공이 있다.[1]
- 열녀
- '''손기후'''의 부인 장씨 : 임진왜란 때 열녀이다.
- '''조덕성'''의 부인 장씨 : 임진왜란 때 열녀이다.
- '''장재환'''의 부인 진씨 : 열행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5. 1. 고려 인물
張鎰|장일중국어은 고려의 창업공신 삼태사(三太師) 중 한 명인 장정필의 후손으로, 고려 원종 때 재신(宰臣)이자 외교가였으며, 하성군(창녕)에 봉해졌다.[1]張鎰|장일중국어의 처음 이름은 민(敏)이고, 자(字)는 이지(弛之)이며, 창녕의 호족(豪族)이었다. 고려 희종 3년(1207)에 태어나 고려 고종 10년(1223)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평판관(昇平判官)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 옮겼다.[1]
원종 초, 전라·충청·경상 삼도안찰사(全羅忠淸慶尙三道按察使)를 거쳐 이부낭중(吏部郎中)과 병부·예부의 이부시랑(兵禮二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했다.[1]
원종 10년(1269) 국자제주(國子祭酒)로서 서경란(西京亂)을 평정하고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원종 12년(1271) 삼별초군(三別抄軍)이 진도(珍島)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경상도수로방호사(慶尙道水路防護使)에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였다. 이듬해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원종 14년(1273)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동지공거(同知貢擧) 등을 역임하였다.[1]
충렬왕 1년(1275)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보문서태학사(寶文署太學士), 수국사(修國史)가 되었고, 하성군(창녕)에 봉해졌다.[1]
장간공은 관직에 재직하는 동안 "8차례나 원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왔지만,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兪棨|유계중국어, 여사제강)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원(元)의 침공을 받던 고려 조정의 어려운 시절에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276년 5월 3일에 향년 70세로 사망하자 조정에서 장간공(章簡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고려사의 사평(史評)에는 "성품은 온공 정직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행정을 수행하는 재주가 뛰어났다."(性溫恭正直 善屬文 長於吏才)라고 기록되어 있다.[1]
『신증동국여지승람』 「順天府」편과 「慶州府」편에 장간공의 시 2수가 전한다.[1]
- 연자루(燕子樓) : 순천
霜月凄凉燕子樓|상월처량연자루|서릿발 같이 찬 달빛 처량한 연자루(燕子樓)에는중국어
郎官一去夢悠悠|낭관일거몽유유|낭관(郎官) 한번 간 후로 꿈만 유유하였네중국어
當時座客休嫌老|당시좌객휴혐로|당시 좌객(座客)을 늙었다고 혐의하지 마소중국어
樓上佳人亦白頭|누상가인역백두|누각 위의 가인(佳人)도 역시 머리가 세었네중국어
- 동경회고(東京懷古) : 경주
四百年前將相家|사백년전장상가|4백년전의 신라 장군과 재상들은중국어
競開臺榭幾雄誇|경개대사기웅과|다투어 누대를 지었으니 그 웅장함 얼마나 자랑했을까?중국어
只今繁麗憑誰問|지금번려빙수문|이제 그 번성하고 화려했던 일들 누구에게 물으리중국어
野杏山桃泣露華|야행산도읍로화|들살구 산복사꽃이 이슬에 맺혀 눈물흐르듯 답해주네.중국어
서거정이 지은 『동인시화』의 ‘의성관루’(義城館樓) 편에 따르면, 시조 장간공의 아들 정하(廷賀)는 일찍이 의성현수(義城縣守)인 오적장(吳迪莊)의 딸과 약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시조공의 묘소는 창녕군 대지면 용소리(龍沼里)의 헌진산(獻津山)에 계좌(癸坐)로 모셔져 있으며, 김도화(金道和)가 지은 비문(碑文)의 묘비(墓碑)가 세워져 있고, 1988년에 이 비문을 번역한 국역비(國譯碑)를 별도로 세웠다. 제 파(諸派)의 후손들이 참사하는 묘사는 음력 10월 첫 일요일이며, 용소리 동민들이 매년 정월 보름날에 시조공의 묘소에서 동제(洞祭)를 지내는 것이 고래(古來)의 전통이 되고 있다.[1]
5. 2. 조선 인물
창녕 장씨는 조선시대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장아(張莪, 1409~?): 창산군의 손자로, 세종 8년(1426) 문과에 급제하여 우헌납, 강원도사, 평양서윤 등을 역임했다.
- 장계증(張繼曾): 장아의 아들로, 세종 24년(1442)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병조정랑, 종부시소윤 등을 역임하고,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남수문의 『경재집』에 "검열장공계증 청제송승광궤시축"이라는 글이 있어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 장계이(張繼弛): 장계증의 동생으로, 문종 1년(1451)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 성균관 사성을 역임했다. 성리학에 정통했으며, 『대동야승』에 따르면 "사람이 처음 죽었을 때는 귀신이 있으나 죽은 지 오래되면 귀신은 없어진다"라고 귀신의 이치에 대해 논했다. 사평에서는 '이학에 정박하고 조행이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서거정, 정극인 등과 교류했으며, 정극인의 『불우헌집』에 "희증 장헌납계이"라는 글이 있다.
- 장우성(張友誠): 세조 1년(1456)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했다.
- 장중성(張仲誠): 세조 7년(1462)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을 역임했다.
- 장희(張禧, 1464~1542): 장아의 손자이자 장세복의 아들로, 연산군 4년(1498) 문과에 급제하여 연산현감을 역임했다.
- 장익(張翼): 연산군 7년(1501)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역임했다.
- 장응성(張應星): 맥계공의 손자로, 자는 천추(天樞)이다. 중종 17년(1522) 문과에 급제하여 밀양부사, 능주목사를 역임했다.
- 장순수(張順受, 1529~?): 도승지공의 증손으로, 자는 정숙(正叔)이었으나 후에 이천(怡天)으로 고쳤고, 호는 만은(晩隱)이다. 명종 11년(1556)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 산음현감을 지냈다. 곽월, 곽황, 송현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분이 있었으며, 특히 산음현감 재직 시절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5. 2. 1. 문과 급제자
이름 | 한자 | 생몰년 | 과거 급제년도(왕)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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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 | 張莪 | 1409년 ~ ? | 세종 8년(1426) | 우헌납, 강원도사, 평양서윤 역임 |
장계증 | 張繼曾 | ? ~ ? | 세종 24년(1442) | 검열, 병조정랑, 종부시소윤 역임,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2등 |
장계이 | 張繼弛 | ? ~ ? | 문종 1년(1451) | 헌납, 성균관 사성 역임, 성리학에 정통 |
장우성 | 張友誠 | ? ~ ? | 세조 1년(1456) | 예조참의, 승정원 도승지 역임 |
장중성 | 張仲誠 | ? ~ ? | 세조 7년(1462) | 홍문관 전한 역임 |
장희 | 張禧 | 1464년 ~ 1542년 | 연산군 4년(1498) | 연산현감 역임 |
장익 | 張翼 | ? ~ ? | 연산군 7년(1501) | 부사 역임 |
장응성 | 張應星 | ? ~ ? | 중종 17년(1522) | 밀양부사, 능주목사 역임 |
장순수 | 張順受 | 1529년 ~ ? | 명종 11년(1556) | 호조정랑, 산음현감 역임 |
장시행 | 張是行 | 1628년 ~ 1688년 | 승훈랑 의금부도사 증직, 정려, 창녕 고강서원 향사 | |
장익정 | 張翼禎 | 1652년 ~ 1697년 | 승훈랑 공조좌랑 증직, 정려, 창녕 고강서원 향사 |
5. 2. 2. 공신
5. 2. 3. 효자
승지공파에서는 효자로 이름난 인물들이 많다. 특히 만은공(晩隱公) 휘 순수(順受)의 자손 계통에서 6대에 걸쳐 8명의 효자가 배출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창산군파에서도 2대에 걸쳐 효자가 나왔다. 6세 8효의 효행에 대해서는 나라에서 특별한 혜택을 요청하는 문서인 소지류(所志類)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1827년, 1828년, 1844년, 1847년, 1879년 등에 경상감사와 창녕 현감에게 올린 자료)[1]이름 | 생몰년 | 자 | 호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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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길(張承吉) | 1566년 ~ 1627년 | 선유(善裕) | 동암(東巖) |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올랐으며, 성품이 순수하고 착하며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로 추천되었고, 석류록(錫類錄)이 있다.[1] |
장지백(張之白) | 1595년 ~ 1661년 | 사호(士皓) | 성품이 뛰어나고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로 추천되었다. 세상에서 고행처사(高行處士)라 칭송되었으며, 석류록(錫類錄)이 있다.[1] | |
장시행(張是行) | 효행으로 증직(贈職), 정려(旌閭), 서원향사(書院享祀)되었다.[1] | |||
장익정(張翼禎) | 효행으로 증직(贈職), 정려(旌閭), 서원향사(書院享祀)되었다.[1] | |||
장속(張 涑) | 1687년 ~ 1764년 | 중광(仲光) | 효성이 지극히 높아 암행어사 박문수의 보고와 감영(監營)의 보고로 급복(給復)의 은전이 내려졌고, 석류록(錫類錄)이 있다.[1] | |
장만(張 滿) | 1700년 ~ 1742년 | 겸숙(謙叔) | 효성이 지극히 높아 암행어사 박문수의 보고와 감영(監營)의 보고로 형인 장속(涑)과 함께 급복(給復)의 은전이 내려졌고, 석류록(錫類錄)이 있다.[1] | |
장한보(張漢輔) | 1737년 ~ 1796년 | 여순(汝順) | 선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효성이 지극히 돈독했으며, 부모의 상에 3년 복을 더 입는 등 효심이 깊어 하늘이 감동하고 사람을 움직였다(感天動人)고 하며, 석류록(錫類錄)이 있다.[1] | |
장한필(張漢弼) | 1742년 ~ 1789년 | 제용(帝用) |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모의 상을 입고 3년간 여묘살이를 하며 슬퍼하니, 도내 유림(儒林)에서 일제히 효자로 추천하였고, 석류록(錫類錄)이 있다.[1] | |
장재환(張再煥) | 1808년 ~ 1894년 | 봉필(奉必) | 은암(隱菴) | 의정부 참정(參政)에 추증되었으며, 효행이 뛰어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1] |
장원호(張元昊) | 두명(斗明) | 송포(松圃) | 은암공의 아들이며, 벼슬이 의정부 참정(參政)에 이르렀으며, 효행이 뛰어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1] |
5. 2. 4. 충신
- '''장승지(張承祉)''' : 참봉공의 증손이며, 자(字)는 희언(熙彦)이다. 통덕랑(通德郞) 벼슬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그 사적이 『창녕읍지』에 실려 있다.[1]
- '''장천장(張天章)''' : 부사공의 5세손이며, 자는 경윤(敬閏)이다.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僉正),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하였고, 이순신 장군 휘하의 옥포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무승지(武承旨)에 이르렀으며, 사적이 『고흥읍지』와 『호남절의록』에 실려 있다.[1]
- '''장시헌(張時憲)''' : 무승지(武承旨) 장천장(張天章)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선전관(宣傳官)으로서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위한 공이 있다. 이때 사촌 형인 장시한(時翰)도 동행했다고 하며, 사적이 『고흥읍지』와 『호남절의록』에 실려 있다.[1]
5. 2. 5. 열녀
5. 2. 6. 학자 및 문장가
창녕 장씨의 시조 장정필의 후손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학자와 문장가로 이름을 알렸다.이름 | 생몰년 | 주요 활동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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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총(鄭摠)의「복재집」에 복재공과 교유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1] | 장 제(張 足+齊) | 장간공의 현손, 고려 때 성균학생으로 등과, 부령(副令)·지제고(知制誥, 문장이 뛰어난 자에게 임명) 역임 | |
장계증(張繼曾) | 세종 24년(1442) 문과 급제, 검열·병조정랑·종부시소윤 역임,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 2등 녹훈, 남수문(南秀文)의『경재집』에 교유 사실 기록[1] | ||
장계이(張繼弛) | 장계증의 동생, 문종 1년(1451) 문과 급제, 헌납·성균관 사성 역임, 성리학 정통, 서거정(徐居正)·정극인(丁克仁) 등과 교유[1] | ||
장흔(張昕) | 승지공의 차남, 자는 여회(如晦), 연산군 원년(1495) 생원시 합격, 가야산 해인사 유람 시 지은 시 1수 전해짐[1] | ||
장응두(張應斗) | 맥계공의 손자, 진사시 합격 후 영천군수·영해부사 역임, 문장 뛰어남[1] | ||
장순수(張順受) | 도승지공의 증손, 자는 정숙(正叔)→이천(怡天), 호는 만은(晩隱), 명종 11년(1556) 문과 급제, 호조정랑·산음현감 역임,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 수학 추정[1] | ||
장익기(張益祺) | 전한공의 현손, 자는 덕경(德敬), 참봉 역임,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1] | ||
장익규(張益奎) | 전한공의 현손, 자는 문재(文哉)·호는 우방(于房), 참봉 역임, 한강(寒岡) 정구(鄭逑) 사사(師事), 강학 정박·조행, 창원 회원서원(檜原書院) 창건[1] | ||
장경백(張警百) | 영해부사 장응두의 아들, 자는 기수(耆叟)·호는 도촌(道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1] | ||
장시걸(張時傑) | 전한공의 6대손, 자는 여우(汝愚), 이요재(二樂齋) 장방익(蔣邦翼)의 문인,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 문집에 시(詩) 수록[1] | ||
장지한(張之翰) | 도촌공의 7세손, 자는 덕오(德五)·호는 이요재(二樂齋), 문장·행검(行檢) 뛰어남, 「면구집」[1] | ||
장박익(張博翼) | 도촌공의 7세손, 자는 붕거(鵬擧)·호는 청천재(聽天齋), 문학 탁락(卓?), 『지씨홍사』 간본(刊本) 글씨[1] | ||
장대선(張大璿) | 효자 휘 한필(漢弼)의 증손, 자는 경칠(敬七)·호는 송오(松塢), 독행실학(篤行實學), 유집(遺集)[1] | ||
장승표(張承杓) | 생원 휘 형(蘅)의 후손, 자는 문우(文佑)·호는 회와(悔窩),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사사(師事), 문장 탁락(卓?)·필법 정예(精銳)[1] | ||
장준호(張駿昊) | 우방공 휘 익규(益奎)의 9세손, 자는 건여(健汝)·호는 석천(石川),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의 문인, 품행 순수(純粹)·지극한 효성, 유초(遺草)[1] | ||
장성호(張性昊) | 효자 휘 한필(漢弼)의 현손, 자는 양능(養能)·호는 만회(晩悔), 조성재(曺惺齋) 문인, 준위(俊偉)한 성품·탁이(卓異)한 식견[1] | ||
장세표(張世杓) | 효자 휘 속(涑)의 7세손, 자는 제경(濟卿)·호는 간서(澗西),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의 문인, 선대 업적 계승·일가 화합 노력, 유고(遺稿)[1] | ||
장지호(張志昊) | 효자 휘 한필(漢弼)의 현손, 자는 학초(學初)·자호(自號) 촤락당(最樂堂),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의 문인, 독행(篤行), 유초(遺草)[1] | ||
장두홍(張斗弘) | 석천 휘 준호(駿昊)의 아들, 자는 원극(元極)·호는 소계(小溪), 가학(家學) 독실(篤實), 온공 정직(溫恭 正直)한 성품·지극한 효성, 공영 사업(公營事業) 공헌[1] | ||
장두윤(張斗允) | 효자 휘 한필(漢弼)의 5세손, 자는 사옥(士玉)·호는 청암(淸庵), 조성재(曺惺齋) 문하, 실용(實用) 학문·지극한 효성, 유초(遺草)[1] | ||
장두한(張斗翰) | 최락당 휘 지호(志昊)의 아들, 자는 사응(士鷹)·호는 눌암(訥庵),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문하, 강학(講學) 근독(勤篤), 선대 덕업 계승, 창녕향교 전교(典校) 역임, 『창녕현지』 발간, 계축보(癸丑譜) 주관 간행, 문중 사행 홍보, 유집(遺集)[1] |
6. 주요 사적
창녕 장씨 시조 장일(張鎰)은 고려 창업공신 삼태사(三太師) 중 한 명인 장정필의 후손이다. 장일은 고려 원종 때 재신(宰臣)이자 외교가로, 하성군(夏城君)에 봉해졌다. 호는 장간공(章簡公)이다.[1]
장간공 장일은 1207년(고려 희종 3년) 창녕의 호족(豪族)으로 태어나 1223년(고종 10년) 과거에 급제했다. 승평판관(昇平判官)으로 선정을 베풀었고, 직사관(直史館),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거쳐 원종 초에는 전라·충청·경상 삼도안찰사(全羅忠淸慶尙三道按察使)가 되었다. 이후 이부낭중(吏部郎中), 병부·예부 이부시랑(兵禮二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역임했다.[1]
1269년(원종 10년) 국자제주(國子祭酒)로서 서경란(西京亂)을 평정하고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1271년(원종 12년) 삼별초군(三別抄軍)이 진도(珍島)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경상도수로방호사(慶尙道水路防護使)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했다. 이듬해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고, 1273년(원종 14년)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동지공거(同知貢擧) 등을 역임했다. 1275년(충렬왕 1년)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보문서태학사(寶文署太學士), 수국사(修國史)가 되었고, 하성군(夏城君)에 봉해졌다.[1]
장간공은 8차례나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1] 1276년 5월 3일 70세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장간공(章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사』에는 그의 성품이 온화하고 정직하며 글을 잘 짓고 행정 능력이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간공의 시 2수가 전해진다.[1]
사가(四佳) 서거정의 『동인시화』에는 장간공의 아들 정하(廷賀)가 의성현수(義城縣守) 오적장(吳迪莊)의 딸과 약혼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1]
장간공의 묘소는 창녕군 대지면 용소리(龍沼里) 헌진산(獻津山)에 있으며, 묘비와 국역비가 세워져 있다. 매년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는 후손들이 묘사를 지내고, 용소리 주민들은 정월 보름날에 동제(洞祭)를 지낸다.[1]
창녕 장씨 관련 유적:
7. 인구
2015년 6,052명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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